
해리스가 흔들린다
미국 대선이 불과 2주도 남지 않았다.
대선 레이스 막판 공화당 대선후보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전 대통령이 각종 여론조사에서 상승세를 보인다.
지난 편 <트럼프의 역습과 오바마의 해리스 구출작전>에서 설명한 것처럼, 주요 경합주인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와 노스캐롤라이나(North Carolina)에서 트럼프의 인기가 조금씩 오르고 있다.
게다가 최근 며칠 동안 트럼프의 당선을 예측한 미국의 선거 전문가들의 입장 발표도 있었다.
분명 9월 10일 트럼프와 상대방인 카멀라 해리스(Kamala Harris) 부통령의 양자 토론 때만 해도 해리스의 압승이 예상됐다.
한 달 이상 해리스는 전국 여론조사에서 대부분 트럼프를 앞섰고, 지금도 전국단위 여론조사에서는 해리스가 우위를 보인다. 다만 경합주의 여론이 흔들리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미국 특유의 선거제도 때문에 해리스는 국민투표에서 승리하고도 대통령 자리를 트럼프에게 넘겨줄 위기에 처해 있다.
네이트 실버(Nate Silver) 등 미국 선거전문가들의 의견을 토대로 왜 해리스의 지지도는 떨어지고 트럼프의 지지도는 올라가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도록 한다.
네이트 실버는 과거 미국 대선 결과를 정확히 예측해 ‘족집게’로 통하는 선거 전문가다.
그는 10월 21일 자신의 웹사이트인 실버 불레틴(Silver Bulletin)에 ‘트럼프가 이길 수 있는 24가지 이유’란 글을 올렸다.
실버의 분석에서 눈에 띄는 점들과 더불어 해당 글에 언급된 다른 전문가들의 설명을 종합해 소개한다.
흑인, 라틴계의 민주당 이탈 현상
흑인과 라틴계는 오랫동안 미국 민주당의 절대적인 지지층이었다. 그러나 10월 들어 흑인, 라틴계의 트럼프 지지세가 심상치 않다는 분석이 나왔다.
뉴욕타임스와 시에나 칼리지(Siena College)가 10월 8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흑인 유권자의 해리스/트럼프 지지도는 78%/15%, 라틴계 유권자의 해리스/트럼프 지지도는 56%/37%로 나타났다.
이 결과만 보면 흑인, 라틴계의 해리스 지지가 공고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2020년 대선에서 조 바이든 민주당 대선후보에 대한 흑인 유권자의 지지율은 92%, 라틴계의 지지율은 63%였다.
1~2% 차이가 중요한 미국 대선의 특성상, 이 정도의 지지율 변화는 대선 결과를 충분히 바꿀 수 있는 큰 변화다.
‘외국인 혐오 전략’의 성공
2016년부터 위 여론조사를 담당해 온 뉴욕타임스의 네이트 콘(Nate Cohn)은 흑인, 라틴계의 지지율 변화와 관련해 몇 가지 분석을 제시하고 있다.
나는 트럼프의 선거 캠페인이 흑인, 라틴계의 인종차별 의식을 깨웠다고 생각한다.
흑인, 라틴계는 오랫동안 백인의 인종차별을 당해온 집단이다.
하지만 동시에 흑인, 라틴계의 상당수는 ‘외국인’에 대한 차별적 감정을 갖고 있다. (트럼프는 오랫동안 주변국에서 온 이민자들과 중국인에 대한 차별을 부추겼다.)
첫 임기 때 트럼프는 어느 정도 미국 내 소수자 집단을 포용하려는 자세를 보였다.
트럼프는 여타 공화당 주요 인사들과 달리 동성결혼을 대놓고 반대하진 않았다. 2020년에는 미국 역사 최초로 남성 동성애자(게이)인 리처드 그레넬(Richard Grenell)을 장관급인 국가정보장(DNI) 대행으로 임명했다. (기사를 보면, 복잡한 인준절차를 생략하기 위해 ‘대행’으로 임명했다고 한다.)
또한 트럼프는 2020년 대선 때 1960년대에 흑인 인권운동가로 활동했던 클래런스 헨더슨(Clarence Henderson)의 지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트럼프의 이런 과거 전략은 2020년 대선에서 완전한 실패로 드러났고, 그는 작전을 바꾸기로 결심한 듯하다.
트럼프는 흑인, 라틴계 유권자가 인종차별의 희생자임을 강조하는 대신, 이들이 외국인, 이주민에 대해 갖고 있는 혐오 감정을 부추기는 방식으로 캠페인 전략을 수정했다.
트럼프는 연설장에서 “아이티 난민들이 고양이와 개를 잡아먹는다”, 이민자들이 “우리나라의 피를 오염시킨다”라는 식의 문제 발언을 했다.
아이티인 중엔 흑인이 많고, 트럼프가 싫어하는 멕시코 난민 중엔 라틴계가 많다.
흑인, 라틴계 미국인들의 상당수는 트럼프의 발언에 분노했지만, 그 분노의 폭은 예전 같지 않았다.
흑인 유권자 중 20%, 라틴계 유권자 중 40%는 트럼프의 여러 문제 발언에 대한 분노는 “그의 말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라 봤다. 별 거 아닌 발언에 ‘진지충’들이 화를 내고 있다는 목소리가 과거보다 커졌다.
또한 위 여론조사에서 흑인 유권자의 40%, 라틴계 유권자의 43%는 트럼프의 남부 국경 장벽 건설 정책을 지지했고, 흑인 유권자의 41%, 라틴계 유권자의 45%는 트럼프의 서류 미비 이민자 추방 정책을 지지했다.
트럼프의 ‘외국인 혐오 부추기기’ 전략에 공감하는 흑인, 라틴계 미국인들의 숫자는 내 예상보다 훨씬 많았다.
악화한 경제 상황과 민주당에 대한 실망
악화한 미국의 경제 상황은 집권당인 민주당에 대한 흑인, 라틴계의 실망을 가져왔다. 코로나 국면에서 펼쳤던 양적 완화 정책은 조 바이든 집권기에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돌아왔고, 이는 상대적으로 사회의 하위 계층에 분포한 흑인, 라틴계에 직접적인 타격이 됐다.
위 뉴욕타임즈 설문조사에는 “약속을 잘 지키는 정당”을 꼽아달라는 항목이 있다. 흑인/라틴계의 63%/46%만이 민주당을 꼽았다.
흑인/라틴계의 해리스 후보 지지도와 비교해 보면, 흑인 응답자 중 15%, 라틴계 응답자 중 10%는 민주당이 약속을 잘 지킨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해리스 후보를 지지하고 있는 셈이다.
해리스가 ‘내 삶에 좋은 변화를 불러올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긍정적 응답을 한 흑인, 라틴계의 비율 역시 해리스 후보에 대한 흑인, 라틴계의 지지율보다 낮았다.
흑인, 라틴계가 민주당에 실망한 이유는 뭘까. 지난 16년 중 12년 동안 미국 민주당은 집권당이었다.
트럼프 집권 기간은 코로나19 국면 와중에 시작됐는데, 코로나19 유행이 걷히면서 한동안 미국은 높은 성장세를 보였다.
아무리 해리스 후보가 “트럼프의 4년이 미국 경제를 망쳤다”라고 주장해도 그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젊은 남성’의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
네이트 콘의 분석에 따르면, 흑인, 라틴계 유권자 중 ‘젊은 남성’ 층은 트럼프에 대한 선호도가 비교적 높았다.
45세 이하 라틴계 남성 유권자의 해리스/트럼프 지지도는 38%/55%로 오히려 트럼프 지지가 높게 나타났다.
같은 연령대 흑인 남성 유권자들의 해리스/트럼프 지지도는 69%/27%였다. 전체 흑인 유권자의 트럼프 지지율에 비해 2배 가까이 높은 수치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있었다. 역대 주요 선거에서 20~30대 연령층은 민주당 지지 성향이 강했으나, 문재인 정부 이후 2030 남성을 중심으로 지지성향을 민주당에서 국민의힘으로 바꾼 사례가 늘어났다.
전술한 바와 같이, 미국 민주당은 최근 16년 중 12년을 집권했다. 청년 시절의 대부분을 민주당 집권기로 지낸 흑인, 라틴계 젊은 남성 중에 흑인, 라틴계 집단 기성세대의 굳건한 ‘민주당 지지’에 불만을 가진 이들이 생각보다 많다.
뉴욕타임스는 흑인, 라틴계 젊은 남성 중에 미국 버전 ‘깨시민’(Woke, 워크) 논리에 분노하는 이들이 늘어났고, 전통적인 민주/공화 양당 구도에 살짝 빗겨나 있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표현 방식에 ‘흥미’를 느끼는 이들이 많다고 분석하고 있다.
다만 흑인, 라틴계 젊은 남성층이 트럼프의 열렬한 콘크리트 지지층이 됐다고 보긴 어렵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흑인, 라틴계 젊은 남성 중 트럼프를 지지한다고 응답한 이들도 대부분 “‘아마도’(probably) 트럼프를 지지할 것”이라 답했다고 한다.
마치 2022년 한국 대선에서 2030 남성을 중심으로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에 대한 강력한 지지 흐름이 나타났지만, 윤석열 후보가 대통령이 된 이후 2030 남성들이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해리스 후보 측에서도 위 뉴욕타임스의 분석을 읽었을 가능성이 높다.
해리스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10월 22일, 23일 연이어 라틴계 ‘젊은 남성’을 겨냥한 듯한 정책을 발표했다.
해리스 측의 의도가 들어간 것인지까지는 모르겠으나 ‘라틴계 남성과 그들의 가족’(Latino men and their families)에 대한 지원책이란 표현이 나왔다.
라틴계 젊은 남성층이 트럼프 콘크리트 지지층으로 변하기 전에 다시 해리스 지지층으로 데려와야 한다는 판단이 선 것 같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으로 인한 지지층 분열
이번 대선에서 카멀라 해리스와 미국 민주당을 괴롭히는 이슈 중 하나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다.(개인적으로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략’이 올바른 명칭이라 생각한다.)
바이든 대통령과 해리스 부통령은 전쟁 국면에서 거의 전적으로 이스라엘의 편을 들고 있다. 하지만 민주당 지지층도 과연 그렇게 생각할지는 의문이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 대한 미국인들의 의식 조사는 작년 말에 실시된 것이 최신 결과다.
작년 11월 16일 미국의 퀴니팩 대학교(Qunnipiac University)에서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응답자 중 민주당 지지층의 경우 연령별로 전쟁에 대한 입장이 확연히 달랐다.
65세 이상의 경우 77%/16%의 비율로 조 바이든의 전쟁 정책을 지지했고, 45%/25%의 비율로 팔레스타인보다 이스라엘의 입장에 공감했다.
반면 35세 미만에서는 69%/24% 비율로 조 바이든의 전쟁 정책에 대한 반대 의사가 높았고, 74%/16%의 비율로 팔레스타인에 공감한다는 의견이 높았다.
결과적으로 민주당 지지층 전체를 보면 이스라엘에 대한 추가 군사지원 여론은 찬성 44%, 반대 49%로 확연히 나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공화당 지지층 내부에서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으로 인한 분열이 보이지 않는다.
공화당 지지자들의 80%가 이스라엘에 공감한다고 답했고, 팔레스타인에 공감한다는 비율은 단 7%였다. 이스라엘에 대한 추가 군사지원에 대한 공화당 지지층의 찬성 비율은 71%에 달했다.
이 여론조사는 작년 10월 7일 하마스의 기습공격으로부터 약 1달 뒤에 발표된 것이다.
그로부터 1년 가까운 시간이 더 흘렀지만 조 바이든 행정부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에 대한 굳건한 지지 의사를 유지하고 있다.
올해 10월 18일 하마스의 수장 야히야 신와르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조 바이든 대통령은 이를 “정의의 순간”이라 부르기도 했다.
전쟁이 장기화하며 미국의 이스라엘 지원도 1년이 넘게 지속되고 있다. 개인적 짐작일 뿐이지만, 지금 다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 대한 여론조사가 실시되어도 1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 본다.
물론 조 바이든 정부의 전폭적인 이스라엘 지지에 못마땅한 민주당 지지자라 하더라도 트럼프를 지지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민주당 지지자면서 민주당 정부의 전쟁 지원에 실망한 이들은 투표장에 나오지 않을 것이다. 특히 박빙 승부가 펼쳐지는 경합주에서는 이런 ‘실망한 유권자들’의 투표 불참이 승자와 패자를 뒤바꿀 수도 있다.
일론 머스크의 트럼프 지지활동
테슬라와 X(구 트위터)를 소유한 일론 머스크(Elon Musk)는 올해 7월 트럼프 후보가 피격사건을 겪은 이후 트럼프 지지 의사를 밝혔다.
10월 초부터는 아예 트럼프의 당선을 위한 유세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10월 5일 트럼프는 피격 사건이 일어난 곳이자 가장 중요한 경합주인 펜실베이니아주의 버틀러(Butler) 시를 찾았고, 이 자리에서 머스크는 처음으로 트럼프와 함께 연단에 서서 트럼프에 대한 지지 발언을 했다.
일론 머스크를 한국 정치인과 비교하면 어떨까. 그는 이준석과 안철수를 섞어놓은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한때 민주당 편에 섰다가 보수 쪽으로 넘어간 혁신 기업가라는 점에서는 안철수, 젊은 남성층의 압도적 지지를 받는 비교적 젊은 인물이라는 점에서는 이준석과 비슷하다.
흑인, 라틴계 젊은 남성의 트럼프 지지율이 과거보다 높아진 이유를 설명할 때도 일론 머스크의 존재를 빼놓을 순 없을 것이다.
다만 머스크는 안철수, 이준석은 따라하기 어려운 능력을 가졌다. 그는 소셜 미디어 X를 통해 자기 생각을 퍼뜨릴 수 있고, 압도적인 자금력으로 선거조직을 굴릴 수 있다.
아메리카 팩이라는 ‘조직’의 힘
이미 9월 26일 가디언은 머스크가 설립한 아메리카 팩(America PAC, ‘PAC’은 ‘정치행동위원회’의 준말)이라는 선거운동 단체가 트럼프 선거운동의 ‘지상전’을 담당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아메리카 팩은 300~400명의 유급 직원을 거느리고 있다. 이들은 7개 주요 경합주(펜실베이니아, 노스캐롤라이나, 조지아, 위스컨신, 미시건, 애리조나, 네바다)에서 활동하는데, 트럼프 지지층으로 예상되는 유권자의 집을 최소 3번씩 호별방문하는 것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다.
양대 후보의 지지율 격차가 미세할 경우 자기편 지지층의 투표율을 높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아메리카 팩이 바로 이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가디언 기사에 따르면, 트럼프 캠프에서는 원래 ‘트럼프 47 캡틴스’라 불리는 2만7000여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선거 운동을 담당했다. 하지만 무급 봉사자들의 선거 운동은 비효율적이었고, 아메리카 팩이 나서면서 조직적인 선거운동이 가능해졌다.
아메리카 팩은 각 경합주 별로 전문업체를 선정해 적극적인 호별방문을 실시하고 있다.
노스캐롤라이나, 미시건, 애리조나, 네바다는 블리츠(Blitz), 펜실베이니아와 조지아는 패트리엇 그래스루츠(Patriot Grassroots), 위스컨신은 시냅스 그룹(Synapse Group)이 담당한다.
이 업체들은 각 주에서 다시 수백 명을 고용하며, 피고용인 1명 당 하루 약 100차례의 호별방문을 실시한다.
또한 머스크는 10월 6일 소셜미디어 X를 통해 트럼프를 지지할 가능성이 높은 경합주 거주 유권자를 소개하는 사람에게 47달러(트럼프가 대선에서 이길 경우 47대 미국 대통령이 된다.)를 주겠다고 발표했다. 이 돈 역시 아메리카 팩을 통해 유권자들에게 전달된다.
아메리카 팩을 통해 머스크는 잠재적 트럼프 지지자들의 개인정보를 수집할 수 있고, 다시 아메리카 팩은 호별방문 지상전에 이 개인정보를 활용할 수 있다.
이미 머스크와 아메리카 팩은 1달 이상 이런 지상전을 펼쳐 왔다.
못해도 각 경합주마다 최소 100만 명을 대상으로 호별방문 선거운동을 펼쳤을 것이다.
소셜 미디어와 현장 선거운동 조직을 갖춘 머스크의 트럼프 지지선언은 유명인 개인의 지지선언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가 있다.
다음 편엔 트럼프의 당선이 한국 경제에 왜 재앙인지에 대해 살펴본다.
(다음 편에)